Iohb3ab [교육에세이] 수업의 예술을 읽고/ 장성모 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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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세이] 수업의 예술을 읽고/ 장성모 저 1

by 청춘교사둘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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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뿌연 안개 속에서

 수업의 예술을 처음 쭉 읽었을 때, 상당한 감동을 일으켰지만 무언가 있는데 잡히지 않듯이, 내 마음에 충분히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책이 의도하고자 했던 지적-정서적 유대와 교섭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책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수업의 의미와 집필 의도, 교사로부터 전해 오는 희열을 알겠으나, 그것은 안개 속 뿌연 공간에 있었습니다. 무슨 끈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끈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씩 베일이 벗겨지는 흥미진진함이 있지만, 결말은 각자의 생각에 맡겨버리는 영화처럼 말이지요. 

 이런 느낌과 생각이 든 건, 초등교과를 아직 마주하지 않은 점과 교과를 곰탕 삶듯 오랜 시간 우려낸 경험도 없으니 어떠한 수업이 대체로 좋은 수업인지 그 기준을 따지기 어려웠던 이유이겠죠. 또한 교단 앞에 서서 10년 밑의 아이들 앞에서 수업하는 것도 상상 속에서 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예비교사들은 아마도 교사의 시각으로 써내려간 ‘수업의 예술’을 통해 교사가 소중히 간직하고 전달하려는 가치와 의미를 모두 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Ⅱ. “알면 알수록 모른다.” 그리고 도움닫기

 ‘알면 알수록 모른다.’ 라고 말을 자주 합니다. ‘수업의 예술’을 읽으니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더욱 앎에 한계에 부딪힘을 여실히 느낍니다. ‘수업’을 대화식으로 하자는 것인가? 소크라테스 문답법으로 하자는 얘기인가? 대답한 학생만 알면 모든 학생 다 안다는 것인가? 그럼 교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학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육과 삶의 관계는? 교과의 내용이 학생의 마음에 어떻게 살아 숨 쉬게 할까? 현장에서는 대체로 어떤 수업을 할까? 교리문답식인가? 대화식인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언제나 불안하고 또 이것이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희미한 공간에 자리한 그 곳에 다다르기 위해 고민이 담긴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이정표 삼아 더욱 나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참고교재로 ‘「수업을 왜 하지?」(서근원,2003)를 정하여 유심히 읽었습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수업의 예술’과 같이 생생한 수업의 현장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수업관찰자인 저자가 수업에 비평을 하고 거기에서 우리 교육을 성찰을 합니다. 수업 안에서 들여다보아야 할 쟁점은 곧바로 '수업의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시각을 전해줍니다.   

 또한, 수업의 예술에서 다룬 교과내용을 에듀넷 우수수업동영상을 통해 시청하기도 했습니다. 수업동영상은 현재 현장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수업을 관찰하고, 수업에 적용된 모형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학생의 모습, 기자재 활용하는 법을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이점도 있습니다. 이 두 참고자료는 다시 들여다 본 ‘수업의 예술’을 다방면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치 달의 이면을 보는 것처럼...그러면 그 끈은 어디에 있을까요?

 Ⅲ. 도움닫기 후, ‘수업의 예술’ 로부터 온 메세지

  1.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

  위 글은 스피노자가 한 말입니다. ‘수업의 예술’ 각 장을 읽을 때마다 이 말을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학생과 선생님이 서로 묻고 표정을 공유하며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은 많은 생각거리를 가져다줍니다.

 깊이 파 내려가기만 한다면 설정해 놓은 목표를 쉽게 도달 합니다. 그러나 드러난 곳은 표면적이 작아 쉽게 무너지거나 파낸 자리가 도리어 묻히기도 합니다.(111p - 할 수 있는 한 쉽게 가르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어리석음...) 반면 고민과 혼란을 거듭하며 넓고 깊게 파내려간 곳은 시간이 걸리지만 표면적이 넓어 무너지거나 묻히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255p - 이 거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너무 서툴게 다루었다는 후회가 든다.) 파내려간 모양을 지식을 담는 그릇이라면 스피노자의 말은 절대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사실, 우수수업동영상을 보면, 조회수와 추천수 만큼이나 이 수업 모형이 학습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을 공감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수업은 도입-전개-정리-평가라는 굴착기로 40분 동안 아주 깊게 파내려 갑니다. 그래서 일까요?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결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생님이 제시한 질문에 많은 손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느낀 것은 ‘기형적이다’ 라는 생각뿐입니다. 교사의 질문도 수박 겉핥기에 머물러 이치에 닿지 않는 상식을 확인하는 수준입니다.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다가도 그 많던 손들이 발표하지도 못하고 내려간 것을 보니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여러 사람이 촬영을 하고 평상시 수업 환경이 아닌 점도 십분 이해하나 수업목표를 설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수업은 참으로 기계적입니다. 깊게 파내려 가기만 하는 수업 ― 주어진 정답을 따라가는 수업이 주는 편리성도 있겠지마는 그 편리성이 주는 해악도 같이 묶여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수업의 예술에서 보이는 수업은 각자가 해답을 찾아가는 수업입니다. 이는 학생들을 수업에서 주체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 주체를 세우는 일을 하는 교사도 서로 상호작용하는 주체입니다. 주체와 주체로 만나는 현장은 단연코 누구를 객체로 본다거나 수단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고 그로 인한 수단의 목적도 없습니다. 반면 답만 찾아가는 일, 교과의 가치를 탐구하지 않고 나아가는 길, 일방적으로 흐르는 수업은 교사와 학생을 수업현장에서 소외하게 합니다. 교사는 앵무새가 된다면, 학생이 자극에만 반응한다면 학교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학교가 없던 시절에도 교육은 있었으니까요.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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